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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p. 47~63 (민음사) ③

by 월가뷰 2022. 8. 25.

오늘의 독서


책을 열며: 사주보고 온 썰

오늘은 저녁에 책을 읽었다. 어제에 이어 무기력감이 있다. 사주를 보러 갔다왔는데, 이번에는 병신합수 라는 개념과 쟁합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화가 많다는 게 단순히 열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신금인 일간을 비춰주는 태양이 있어서 원래의 신금이 아니라 수의 기운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내면을 다루는 일을 하는 걸 말하는 걸까. 사실 이번이 가장 아마추어 같은 느낌이라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나고, 돈을 낭비한 것 같지만... 그래도 내 화다사주에 대한 오해를 풀어서 좋다. 그리고 나보고 재물운이 들어와 있는데도 돈 벌 방법을 몰라 동동거린다며, 일단 돈을 굴려보라고 하신다. 문제는 돈이 없다는 건데.. 블로그를 통해서 수익을 남길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카드 결제일이라 우울한가 보다. 나 생각보다 세속적이고, 돈을 좋아하는 인간이구나. 뭔가 스스로에게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홀가분하기도 하다. 내가 아주 멍충이는 아니구나 싶어서. 그렇지만 실속없이 살고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앞으로 몇년동안은 돈이 들어온다 하니 열심히 살아야겠다.

아, 12살부터 대학졸업까지만 딱 공부했네. 하시는데 빵터졌다. 나는 공부쟁이가 아니다. 현실을 빨리 깨쳤다고 하신다. 의아한 부분도 있는데, 일단 공부는 여차저차해서 대학원까지 졸업했으니, 더는 하지말자. 그러니까 입시나 점수내는 그런거. 앞으로 나에게 도움이되는 실질적인 공부를 하자구.



젊은 예술가의 초상 p. 47 ~ 63 (민음사)

 

 

 

그런데 도대체 어느 편이 옳단 말인가? 그러자 그에게는 클롱고우스의 진료실에서 보낸 하룻밤이 생각 났다. 그 어두운 바닷물이며, 부둣가의 등불이며, 파넬의 죽음을 듣고 백성들이 슬피울던 일들이 생각났던 것이다.
- p.56

케이시 씨는 아일랜드의 독립과 파넬을 지지하고 있었고, 아버지 또한 그러했다. 단티 또한 아일랜드의 독립을 원한다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 p. 59

"하느님과 종교는 다른 모든 것들 보다 앞선단 말예요!" 단티는 소리쳤다. "하느님과 종교는 이 세속보다 앞선다고요!" 케이시 씨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식탁을 꽝 내리쳤다. "좋소." 그는 거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게 그렇다면 아일랜드에 하느님은 필요없소!"
....
"아일랜드는 그간 하느님 때문에 신물이 났단 말이오. 하느님 같은 건 없어졌으면 좋겠단 말이오!"
-p.62



오늘 장면은 크리스마스 만찬 식탁에서 벌어진 싸움 씬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친지모임에서는 정치, 종교 이야기는 금물임을 깨닫는.. 이 모든 것이 어린 스티븐의 목전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어른들의 싸움은 얼마나 두렵고 혼란스러운 일이었을까? 자신이 좋아하고 아끼는 가족들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얼굴을 붉히는 상황이,, 슬프고 무기력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 마치 부부싸움 사이에 낀 아이처럼말이다. 어쩌면 자신의 잘못인것만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종교, 성직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 구시대와 변화된 시대 속에서 대립하며 아일랜드는 갈등이 심화되어 분열되고 있다. 그들은 모두 독립을 원하지만 각자가 원하는 국가의 모습이 달랐다고 하겠다. 아직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은 소년은 어떤 의견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채, 단지 '하얗고 차가운 것이 상아'라는 것만 을 되뇌일 뿐이다. 스티븐은 자신이 추구하는 천상의 가치인 '종교적 지고의 가치'와 현실 속 종교의 정치, 사회 참여라는 부분 사이에서 고뇌하게 될 운명이 아닐까.

 

 

책을 덮으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종교심으로 가득했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교회와 신앙이 전부였던 시절, 동시에 세속적인 사랑에 눈을 뜬 시기였다. 나는 지혜가 부족하고, 융통성이 없어서 어떤 가치든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어야 하는 극단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직 미성년이었고, 가치관과 자아가 다 형성되지 않았는데, 교회에서의 교육은 아주 분명하고 명확했기 때문이다. 나는 회색지대에서 답을 구하지 못해 고뇌에 빠졌다.

대학에서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담론을 받아들여, 이 부분에 크게 공감했는데 물론 기존 '제도권' 교회의 권력 순응적 측면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교회 안이 아닌 교회 밖에서의 '신'에 대해서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회운동에 치우치다보니, 종교의 순수성이 훼손되는 부분이 있었음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거룩함과 세속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현재 나는 이른바 '가나안 성도'라는 시류에 몸을 맡겼지만, 사주를 보러다닐 정도로 신앙생활과 멀어져있다. 이제는 내가 믿었던 존재를 타자로써 바라보게 된다. 모든 걸 걸었던 공동체를 하나의 규범조직을 보게된다. 인간이 가진 한계와 그럼에도 영적인 존재에 대한 추구의지를 생각해본다. 나약한 존재들이 자신의 삶을 의미짓고, 또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전히 절대적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절대자가 실재하든 아니든, 그 믿음은 그 자체로서 기능하고 효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게될지, 곁가지에서 구도자로 살아갈지 나도 모르겠다. 다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 살을 깎아내듯이 고통스러워 했던 시간이었던 만큼 나를 정의하는데 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그런 모습을 투영하고 정리하면 좋겠다.

 

 

2022.08.25.
월가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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